고례마을
단장면의 동남쪽 변경에 위치한 동리(洞里)로 산천과 수석이 빼어난 명승지이다. 서북쪽의 이웃 동리(洞里)인 범도리(泛棹里), 아불(阿佛)에서 구절양장(九折羊腸)과 같은 고사천(姑射川) 계곡을 거슬러 남하하면 평리(平里), 고례(古禮), 사희동(四熙洞), 덕달(德達) 등 자연 마을이 그림 같은 산수 속에서 차례대로 전개되고, 동북쪽에는 또 다른 승경(勝景) 속에 소월리(所月里)(바드리)와 풍류동(風流洞)이란 산상(山上) 별구(別區)가 숨어 있는 곳이다. 동남쪽에는 향로봉(向路峰)의 높은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려쳐진 가운데 양산군 하서면과 군계(郡界)를 이루었고, 서쪽에는 뇌암산(雷岩山)을 사이에 두고 국전리와 이웃해 있으며, 북쪽으로 높다란 산봉우리 너머에 구천리, 범도리와 경계를 짓고 있다. 밀양댐이 위치하고 있어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산명수려(山明水麗)하고 계류(溪流)와 전답(田畓)이 아름다우며 기암절벽 이 마치 옥(玉)기둥을 세워 놓은 듯 깨끗한 인세(人世)의 진경(眞境)이라 한 기록이 있거니와 고사천(姑射川) 상류(上流) 맑은 계류(溪流) 가에 있는 농암대(籠岩臺)는 그 대표적인 명승지라 할 수 있다. 조선조 초기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이 곳을 찾아 유상(遊賞)했으며 승경 (勝景)을 읊은 시(詩)도 남기고 있으니 마을의 여러 지명도 선생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고례리는 이미 오랜 옛날부터 마을이 형성 되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고, 당초의 지명은 고예(庫藝)라고 했다. 또 동리 (洞里)의 형국이 마치 서북쪽에 있는 범도행주(泛棹行舟)를 마고 할미가 끌어들이고 있는 것과 같다 하여 고예(姑曳)라고도 했으며, 그 뒤 신선이 사는 곳을 가상하여 고사리(姑射里), 고사산(姑射山), 고사천(姑射川) 등으 로 아름답게 바꾸기도 했다. 점필재 선생이 이 곳을 유력한 이후에는 언제 부터인지 이 마을이 고례리로 표기되었다 하며, 통안의 다른 자연 마을들 도 도덕(道德)이 통달한 덕달(德達) 마을, 상산(商山)의 사호(四皓)가 놀던 곳이라는 사호리(四皓里) 등 뜻 깊은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1914년 행 정구역 개편시에 구천리(九川里) 일부와 양산군 원동면의 중선리(中善里) 일부를 병합하여 고례리(古禮里)의 법정리(法定里)를 구성하였다.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사호정 : 단장면 고례리 사호동에 있다. 조선조 중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 감찰을 지낸 학자 채지당 박귀원(1442~1530)이 이곳에 별업을 지어 은거한 곳이다. 채지당 사후에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폐허만 남아 있던 것을 1606년에 현손인 락춘 박이화와 양제 박이문 형제가 이곳에 다시 재견하였다. 그후에도 몇 번의 흥패를 거듭하다가 1958년에 16세손인 박기학이 모든 후손들과 협력하여 지금과 같이 중건한 것이다. 사호정이란 이름은 점필재 김종직이 그 제자인 김한원당, 정일두와 함께 이곳을 방문하여 중국 상신의 고취를 모방하여 지어준 것이라 전해온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고예(古禮, 姑射, 姑曳, 庫藝),구곡천(九曲川), 덕달(德達,떡달이), 농암대(籠 岩臺)
지명유래
* 고예(古禮, 姑射, 姑曳, 庫藝) : 평리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이 통 안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심 되는 마을이다. 고사천(姑射川) 계류(溪流)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 양지마(陽地), 남쪽에 음지마(陰地), 물 건너에 구석마(龜石村) 등 세 땀으로 나누어져 있다. 고예 (庫藝)와 고예(姑曳) 또는 고사(姑射) 등의 옛 이름은 이 마을을 두고 일러 온 것이며, 지금도 고례초등학교와 버스정류장 등이 있어 생활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양지마에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사(處士) 장내 강(張乃絳)이 피난지로 정한 곳이며 그 이후 인동(仁同) 장씨(張氏)의 마을 이 되었다. 후손들이 1957년에 옥봉(玉峰) 아래에다 옥봉정(玉峰亭)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음지마도 인동(仁同) 장씨 일파의 마을로 순조(純祖) 때 진사 장창익(張昌翼)이 살았으며, 그 아들 장응구(張膺九)는 효자로서 나라의 명정(命旌)이 있었는데 1898년(광무 2)에 동구(洞口) 밖에다 삼성각(三省閣) 이라는 효자각(孝子閣)을 세워 기리고 있다. 구석마는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다 하여 구석촌(龜石村)이라 하는데 역시 인동(仁同) 장씨의 세거지(世居地)이다. 조선조 숙종 때에 낙주(洛洲) 장선흥(張善興)이 시천(始遷)한 곳으 로 1918년에 장씨 문중에서 입촌한 선조와 그 후손인 농산(聾山) 장영석(張 永錫)을 추모하기 위하여 낙주정(洛洲亭)이란 제사를 세웠다.
* 구곡천(九曲川) : 사희동(四熙洞)에서 사연리(泗淵里)까지 흐르는 계류(溪流)의 지명이다. 아홉 굽이를 돌아 흐른다 하여 생긴 이름인데 채지당(採芝堂) 박구원(朴龜元)의 고사구곡가(姑射九曲歌)에서 연유(緣由)한 것이다. 구곡(九曲)은 사연(泗淵), 정각산(正覺山), 범도리(泛棹里), 승학동(乘鶴洞), 단애(丹崖), 증소(甑沼), 도장연(道藏淵), 농암대(籠岩臺), 선소(船沼)를 가리킨다.
* 덕달(德達,떡달이) : 고례 마을의 남쪽 골짜기 안에 있으며, 고사천(姑射川) 상류(上流)에 위치한 자연 마을이었다. 조선조 초기에 점필재선생과 같이 도덕과 문장에 통달한 명현(名賢)들이 유상(遊賞)한 곳이라 하여 덕달(德達)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고 한다. 떡달이는 덕달의 된소리 발음으로 별다른 뜻이 없는 지명이다. 행정상으로는 덕달 본동 이외에 죽촌(竹村) 마을과 농암대(籠岩臺) 어구에 있는 사희동(四熙洞)이 이 마을에 소속되어 있다. 덕달마에는 조선조 숙종때 덕산(德山) 이경범(李敬範)이 입촌(入村)하여 경주 이씨 일파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으며, 1960년에 그 후손(後孫)들이 덕산재(德山齋)를 세워 보존하 고 있다. 사희동(四熙洞)은 조선조(朝鮮朝) 성종(成宗) 때 채지당(採芝堂) 박구원(朴龜元)의 구거(舊居)로 본래 이 곳에는 별업(別業)이 있었는데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 세 명현(名賢)이 방문하여 소요(逍遙)한 곳이라 한다. 점필재 선생이 옛날 중국 상산(商山)의 고취(高趣)를 모방(模倣)하여 별업(別業)의 편액(扁額)을 사호정(四皓亭)이라 했다고 한다. 사호동(四皓洞)은 사호정(四皓亭)에서 파생(派生)한 이름이 며, 그 후 사희동(四熙洞) 또는 사의동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지금 보존되고 있는 사호정(四皓亭) 건물(建物)은 1606년(宣祖 39)에 채지당(採芝堂)의 현손(玄孫)인 악춘(樂春) 박이화(朴而華)와 양재(讓齋) 박이문(朴而文) 형제 가 중건(重建)한 것을 그 후 몇 번의 흥폐(興廢)를 거듭하다가 1958년에 재건(再建)하여 밀성 박씨 문중에서 재사(齋舍)로 삼고 있다. 현재는 밀양댐 준공으로 수몰되었다.
평리마을
평리마을 전경 단장면의 동남쪽 변경에 위치한 동리(洞里)로 산천과 수석이 빼어난 명승지이다. 서북쪽의 이웃 동리(洞里)인 범도리(泛棹里), 아불(阿佛)에서 구절양장(九折羊腸)과 같은 고사천(姑射川) 계곡을 거슬러 남하하면 평리(平里), 고례(古禮), 사희동(四熙洞), 덕달(德達) 등 자연 마을이 그림 같은 산수 속에서 차례대로 전개되고, 동북쪽에는 또 다른 승경(勝景) 속에 풍류동(風流洞)이란 산상(山上) 별구(別區)가 숨어 있는 곳이다. 동남쪽에는 향로봉(向路峰)의 높은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려쳐진 가운데, 서쪽에는 뇌암산(雷岩山)을 사이에 두고 국전리와 이웃해 있으며, 북쪽으로 높다란 산봉우리 너머에 구천리, 범도리와 경계를 짓고 있다.
마을약사(전설)
동리(洞里)의 서북쪽 범도리(泛棹里)에서 들어오는 들머리에 있는 마을이다. 고사천(姑射川)을 끼고 있으며 비교적 들판이 넓은 이 지대는 지금은 2001년 11월 완공된 밀양댐으로 수몰된 고례천(古禮川) 상류부근인 농암대(籠岩臺)서 흘러내리는 급류로 많은 토사(土沙)가 쌓여서 이루어진 비옥한 평지지대(平地地帶)이다. 평리(平里) 또는 평리(坪里)라고 하는 것은 평평한 들판 마을이라는 뜻인데 이 통 안에서는 전답(田沓)이 제대로 갖추어진 행정 부락의 하나이다. 이 부락 건너 하천(河川)가에 모래동(사동(沙洞))이라는 땅이 있고 동편으로 골짜기를 한참 들어가면 풍류동(風流洞)이라는 아름다운 땅이 자리 잡고 있다.
지명유래
평리(平里, 坪里) : 동리(洞里)의 서북쪽 범도리(泛棹里)에서 들어오는 들머리에 있는 마을이다. 고사천(姑射川)을 끼고 있으며 비교적 들판이 넓은 이 지대는 농암대(籠岩 臺)서 흘러내리는 급류로 많은 토사(土沙)가 쌓여서 이루어진 비옥한 평지 지대(平地地帶)이다. 평리(平里) 또는 평리(坪里)라고 하는 것은 평평한 들 판 마을이라는 뜻인데 이 통 안에서는 전답(田畓)이 제대로 갖추어진 행정 마을의 하나이다. 이 마을 건너 하천(河川) 가에 모래동(사동(沙洞))이라는 땀이 있고 동편으로 골짜기를 한참 들어가면 풍류동(風流洞)이라는 아름다 운 땀이 자리 잡고 있다. 또 구천(九川) 삼거리쪽으로 길이 나 있는 산상 (山上)의 별구(別區)인 소월리(所月里)(바드리)와 번데기마도 행정적으로는 평리(平里)에 소속된 취락이다. 조선조 정조때에 월간(月磵) 구(具)경이 이 마을에 시거(始居)한 후 능성(綾城) 구씨(具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으 며, 1975년에 추모재(追慕齋)를 세워 보존하고 있다.
풍류동(風流洞) : 평리 마을에서 바드리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바드리 아랫마 라고도 한다. 이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여러 가지 지명(地名)이 있는데, 마을 앞에는 풍수지리의 옥녀혈(玉女穴)이 있다 하고, 동서쪽으로는 둥둥재 라는 고개가 있으며, 아래쪽 물 가운데 북바위(鼓岩)가 서 있고, 그 위쪽에는 퉁소바위(簫岩)가 있다. 또 이 바위 위쪽에 있는 산을 칭칭이산이라 하니 모 두가 풍류와 관계되는 지명이다. 곧 퉁소를 불고 북을 치며 칭칭나네를 부르고 춤을 추는 풍류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풍류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범도마을
범도마을 전경 동리(洞里)의 중심 마을으로 메물산(木麥山)을 등에 지고 고사천(姑射川) 동편(東便) 강가에 자리잡은 고촌(古村)이다. 마을 앞에 호수처럼 생긴 깊은 소(沼)가 있어 범도연(泛棹淵) 또는 도연(棹淵)이라 했으며 동리(洞里)의 지형(地形)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돛단배 같다 하여 붙인 지명이라 한다. 또 범돈, 범든이라 하는 것은 범도연(泛棹淵)의 발음이 줄고 바뀌어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을약사(전설)
조선조후기에 국난에 이바지한 공로로 나라에서 표창을 받은 서운룡(徐雲 龍)이 이곳에 터를 잡은 후 대대(代代)로 달성(達城) 서씨(徐氏)가 살았고, 같은 시기에 효행으로 이름을 얻은 오정몽(吳禎蒙)이 입촌(入村)함으로서 해주(海州) 오씨(吳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기도 했는데 철종 때는 도사 (都事) 오필선(吳必善)의 효자 정여(旌閭)가 내리기도 했다. 또 인근 죽림 (竹林) 안희원(安禧遠)이 그 아버지 치와(恥窩) 안효완(安孝完)을 위하여 세운 도연정(櫂淵亭)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다만 그 유허(遺墟)에 이선대(移船臺)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그리고 마을 남쪽 고례리와의 경계 지점인 박산(博山) 산 중허리에는 옛날 심진암(尋眞庵)이라는 절터가 있었고, 그 아래쪽에 1916년에 부북면 퇴로리(退老里)에 거주하는 여주(驪州) 이씨문중(李氏門中)에서 그 선조인 도원(桃源) 이종극(李鍾極)의 소요처라 하여 도원정(桃源亭)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지명유래
구시방골못(凹谷池) : 범도연 건너편 구시방골 뒷산 중턱 골짜기 안에 있었다. 옛날부터 이곳이 명당 자리라는 소문이 있어 어떤 사람이 묘(墓)를 서고 나서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자가 된 이후에는 찾아오는 식객(食客)과 과객(過客) 들 때문에 그 가모(家母)가 많은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술(道術)이 있다는 중 한 사람이 찾아들어 시주(施主)를 청하였다. 그 가모(家母)가 은밀히 중을 만나서 듬뿍 시주를 하고는 전후 사정을 이야기한 끝에 과객(過客)과 식객(食客)이 찾아오지 않도록 하는 비방(秘方)을 물었다. 중은 대답하기를 “비방(秘方)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후회를 하실 터인데요.”하고 난색을 표했다. 이에 가모(家母)는 나중에라도 후회와 원망은 하지 않을 터이니 비방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다. 그 중은 입맛을 다시며 마지못해 하는 듯 하면서” 범도연 건너편 구시방골에 있는 선산 앞에 못을 파시오. 그러면 과객 식객의 발이 뚝 끊어질 것입니다.” 하고는 떠나 버렸다. 가모는 바깥주인과는 아무런 상의 없이 몰래 종복들을 동원하여 구시방골 선산 앞에다 못을 파 내려갔다. 얼마쯤 못을 파내려 가는데 별안 간 땅이 터지는 것 같은 폭음과 함께 땅속에서 김이 솟아올랐다. 이윽고 그 자리에 못을 완성시키기는 하였으나, 웬일인지 갑자기 가세(家勢)가 기울어 얼마 가지 않아서 집이 망해버렸다. 부자의 인색함과 가모(家母)의 분별 없음이 복(福)을 차버리고 화(禍)를 자초(自招)한 것이다. 지금은 못이 없어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아불마을
범도연 북쪽 메몰산 아래에 있으며 표충사행 국도변에 위치한 큰 마을이다. 원래는 작은 주막(酒幕)거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1922년에 이곳에다 사립표충학원(私立表忠學院)을 설치한데 이어 곧 태룡초등학교 산동분교가 들어서게 됨에 따라 마을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 후 학교는 다시 산동초등학교로 승격되고 표충사의 어귀로서 버스정류소 등 생활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지금은 산중 도방의 구실을 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약사(전설)
이 마을의 본래 이름은 아화(阿火)라 했다. 옛날에 어느 노승(老僧)이 지나 가다가 큰불이 나겠다고 예언한 일이 있었는데, 과연 2년 만에 마을에 큰 화재가 났으므로 지명이 불길하다 하여 부처님의 가호(加護)를 빈다는 뜻 에서 아불(阿佛)이라 표기한다고 한다. 이 마을의 서쪽 냇가에 있는 새마 와 골마(谷村)와 표충사행 국도변에 위치한 석밭탱이도 행정상 아불에 소속된 땀이다.
유물, 유적
반계정 반계정 : 문화재자료 제 216호로 영조때 산림처사로 이름이 높았던 반계 이숙의 별업으로 1775년에 창건했는데, 밀양강의 맑은 물이 감도는 강언덕 반석위에 건물을 세운 것이 특징인데, 당시 고을 명류들과 어울려 청담하고 시를 읊던 곳이다.
지명유래
골마(谷村) : 아불 본동의 서쪽에 있는 강가의 작은 마을이다. 정각산 아래에 위치하여 골짜기 안에 있다 하여 골마(谷村)라는 지명을 얻었다. 옛날부터 정각산의 닥나무로 한지(韓紙)를 만들어 온 마을인데 범든종이의 본포가 이곳에 있었다. 구한말(舊韓末)에 사인(士人) 이병관(李炳觀)이 이 마을에 입촌하여 도연 정사(道淵精舍)를 세우고 은거(隱居)한 일이 있다.
새마(新村) : 석바탱이에서 아불 마을로 가는 국도변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新村)라 하였다.
정각산 절터(正覺山, 鼎角山) : 사연 본동 동북쪽 반계정 뒷산 중허리에 절터가 있고 종 모양의 돌 부도(浮 屠)가 있다.1900년 경에 이 곳에서 돌부처가 나왔다고 하며 절은 없어졌다. 정각산에 있는 절이었다 하여 정각사라 했는데 절은 없어졌다. 정각산(正覺 山)은 일명 정각산(鼎角山)이라고도 하며 산봉우리의 모양이 마치 쇠뿔(牛角)과 같이 생겼다 하여 솥뿔(鼎角)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바드리마을
단장면의 동남쪽 변경에 위치한 동리(洞里)로 산천과 수석이 빼어난 명승지이며, 밀양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 1오치, 2바드리, 3감물리라고 할 만큼 높은 지역이다. 그리하여 고랭지 채소로 이름 난 곳이기도 하며 최근에는 사과, 배, 석류 등을 재배하는 농가가 늘어나고 있다. 서남쪽으로는 평리, 서북쪽으로는 삼거와 인접해 있으며 이 마을 뒷산인 백마산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바드리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본래 바드리마을은 평리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었으나 기존 본동인 평리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고 교통이 불편하여 2017년 1월 1일자로 분통되어 하나의 행정마을로 편성되었다.
마을약사(전설)
바드리는 바오달리라는 말로써 옛날에 군사가 진을 친 자리를 말한다. 평리마 뒷산 중턱에 있는 마을인데 산등성이가 펑퍼짐하고 제법 넓은 들이 있는 고지대 부락이다. 옛날부터 일오치(一烏峙), 이소월(二所月), 삼감물(三甘勿)이라 하여 밀양지역에서 세 고지대의 하나로 꼽는 마을이다. 일조(日照)가 좋아 고랭지 채소 재배로 유명한데 특히 바르디 무는 전국에서도 유명하다. 이 마을 뒷산은 백마산(白馬山)으로 아득한 옛날에 산사테가 져서 반달 모양으로 형성된 산(소월산(所月山)이 있다 하여 마을이름이 바드리가 되고 소월리(所月里)로 표기하였다. 마을 근처에는 ‘소월산태두외(所月山泰斗外)’라고 하는 명당 자리가 있다고 전해진다.
지명유래
바드리(所月里) : 평리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마을인데 산등성이가 펑퍼짐하고 제법 넓은 들이 있는 고지대 마을이다. 이 마을 뒷산은 백마산(白馬山)으로 아득한 옛날에 산 사태가 져서 반달 모양으로 형성된 산(소월산(所月山))이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이 바드리가 되고 소월리(所月里)로 표기하였다.
<밀양시 홈페이지> 참조